미국 진출을 준비하는 의료기기 회사들 사이에서 은근히 반복되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번에 제도가 바뀌면 심사가 좀 빨라지지 않을까요.”
신청 건수는 계속 느는데 리뷰어 수는 그대로다 보니, 다음 제도 개편 때는 속도전에서 숨통이 트일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죠. 최근 FDA가 내놓은 신호는 정반대였습니다. 빨라지는 게 아니라, 더 촘촘해진다는 쪽이었습니다.
MDUFA는 그냥 수수료 제도가 아닙니다 – FDA와 업계가 맺는 5년짜리 약속입니다
의료기기를 미국에 내놓으려면 510(k), De Novo, PMA 같은 경로로 FDA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 심사에는 수수료가 붙는데, 그 수수료를 재원으로 FDA가 심사 인력을 확충하고 처리 기간 목표를 지키기로 업계와 5년 단위로 약속하는 제도가 바로 MDUFA(Medical Device User Fee Amendments)입니다.
FDA가 최근 공개한 건 그 6번째 재승인, MDUFA VI의 초안 공약서입니다. 적용 기간은 2028회계연도부터 2032회계연도까지. 지금 이 협상안이 어떻게 확정되느냐에 따라, 앞으로 5년간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기기를 낼 때 마주할 심사 풍경이 달라집니다.
이번엔 다릅니다 – “더 빠르게”가 아니라 “더 똑같이”
지금까지 MDUFA 재승인은 대체로 심사를 더 빠르게 만드는 방향으로 움직여왔습니다. 이번엔 결이 다릅니다. FDA 관계자들은 최근 MDUFA VI가 이전 버전 대비 심사 기간을 더 단축하기보다, 심사 과정의 일관성을 높이고 국내 우선순위를 촉진하는 쪽에 무게를 두겠다고 밝혔습니다.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더 빨리 봐주겠다”가 아니라 “리뷰어가 바뀌어도 같은 기준으로, 예측 가능하게 보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겁니다.
“일관성”이 마냥 좋은 소식만은 아닌 이유
업계에서 오래 지적돼온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일관성 부족이었습니다. 같은 종류의 기기인데도 담당 리뷰어에 따라 요구 자료 범위가 달라지고, 추가자료요청(AI Request)이 나오는 기준도 제각각이라는 불만이 꾸준히 있었거든요. 그래서 언뜻 들으면 반가운 변화입니다.
문제는, 일관성을 높이는 방향이 실무에서는 종종 심사 기준의 상향 평준화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느슨했던 리뷰어의 기준이 엄격한 쪽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속도가 빨라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완성도 높은 자료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뜻입니다.
의료기기 업계가 아니어도 남 얘기는 아닙니다
MDUFA 협상에는 디지털 헬스, AI 탑재 기기, 실사용증거(Real-World Evidence) 활용 확대 같은 항목도 포함돼 있습니다. 스마트워치의 심전도 기능, AI가 영상을 판독해주는 진단 보조 기기처럼 일상에서 접하는 첨단 의료기기가 미국 시장에 얼마나 빨리, 얼마나 안전하게 나올 수 있는지를 좌우하는 제도라는 뜻이죠.
심사가 너무 느슨하면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제품이 시장에 풀릴 위험이 있고, 지나치게 경직되면 정말 유용한 혁신 기기가 소비자에게 늦게 도착합니다. MDUFA는 그 균형점을 5년마다 다시 정하는 작업입니다.
한국 제조사라면 지금부터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 “빨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두는 게 좋습니다. FDA 스스로도 이번엔 속도 단축이 목표가 아니라고 밝혔으니까요. 협상안이 통과되더라도 심사 속도 자체가 개선될 가능성보다, 서류 완성도에 대한 눈높이가 전반적으로 올라갈 가능성에 대비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 AI·실사용증거 관련 조항은 따로 챙겨보시길 권합니다. 협상안에는 AI 기반 기술과 실사용증거 활용에 대한 FDA의 지원 확대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AI 소프트웨어가 들어간 기기, 혹은 시판 후 데이터로 적응증을 넓히려는 기기를 준비 중이라면 세부 조항이 어떻게 확정되는지가 실무에 바로 영향을 줍니다.
아직 법으로 확정된 건 아닙니다. 초안 공약서에 대한 공개회의와 서면 의견 수렴은 이미 마무리됐지만, 정식 법제화까지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다만 “일관성 강화”라는 방향성 자체는 FDA 내부적으로 이미 상당히 굳어진 기조로 보는 게 맞습니다.
이번 MDUFA VI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느리더라도 제대로, 다 같은 기준으로 보겠다”는 쪽입니다. 심사관 개인의 성향에 기대기보다, 처음부터 어떤 리뷰어를 만나도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의 자료를 준비하는 게 이번 변화에 대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지금 준비 중인 서류가 “리뷰어를 가리지 않는” 수준인지, 한 번쯤 점검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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