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경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대표가 성수동 1호점 양조장과 창고를 보여주고 있다.
VC가 이 회사에 왜 투자했을까 –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김태경 대표에 대해 설명할 때 종종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수제 맥주 사업에 뛰어든 억대 연봉 컨설턴트’. 수제 맥주 사업을 하기 전 그의 직업이 컨설턴트였고, 억대 연봉을 받는 것은 물론, 꽤나 잘 나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수식어가 붙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를 인터뷰하면서 느꼈던 것은 그는 본질적으로 맥주를 너무나 사랑하는 맥덕(맥주덕후)이라는 점이었다. 김 대표 역시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맥덕이 수제 맥주 회사를 차린 것으로 봐 달라”라며 “다만 당시 직업이 우연히 컨설턴트였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하는 일이 단순히 수제 맥주 가게를 하나 여는 게 아니라는 것도 취재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그저 그가 수제맥주집을 하나 열었다면, 그것 역시 자신의 인생에는 큰 의미가 있었겠지만 세상에 무슨 큰 변화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는 맥주 시장을 바꿔보려는 도전을 하고 있었다. 한국적 토양에 맞는 맥주, 한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맥주, 그리고 세계 시장에 진출해 글로벌 브랜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런 맥주를 만들려는 게 그의 꿈이었다. 이 꿈은 분명 ‘남다른 꿈’이라고 할 수 있고, IT(정보기술)분야에 주로 투자하는 VC(벤처캐피털)들이 이 회사에 투자한 것도 바로 이 남다른 꿈과 목표때문 아닐까.
“공부하러 갔다가 맥주 맛을 알아버렸다”
필자 개인의 경험을 살짝 얘기하자면, 2011년 봄 체코 지역을 방문했다가 맥주의 ‘맛’이란 걸 처음으로 느낀 적이 있다. 당시 ‘필스너 우르켈’이라고 하는 체코 지역의 맥주(지금은 국내 마트 등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그때 그 맛은 아니다.)를 처음 마셨는데,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과거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에서 좋은 와인을 마실 때 눈 앞에 푸른 초장이 펼쳐지고 꽃향기가 난다는 식으로 표현한 걸 보면서 ‘너무 과장이 심하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느낌이 꼭 그랬다. 정말 맛있는 무언가는 그런 감동을 주기 마련일까. 하여간 그때 이후 맥주 맛에 유독 민감해졌다.
김 대표 역시 그랬다. 그는 2005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P&G에서 일하다 2010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대학교 켈로그경영대학원에 유학을 떠났다. MBA를 하러 간 거였는데,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 경력상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MBA 과정 중 그는 엉뚱(?)하게도 맥주에 눈을 떴다. 기숙사에서 가까운 한 마트에서 100여 가지가 넘는 세계 각지의 맥주를 보게 된 것이다. 맥주가 세상에 그렇게 다양한 줄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맥주를 마시다 보니 맥주 양조장을 찾게 됐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맥주를 정말 사랑하게 됐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이런 맥주 맛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왠 걸? 한국에 들어와보니 이미 수제 맥주 집이 많이 생겨나고 있었다. 경리단길 등에는 수제 맥주 집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다만 대부분 영세한 규모였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맥덕이었다. 맥주에 관심이 많고 매우 좋아하지만 사업적인 부분은 아직 생각지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마치 운명처럼 그에게 생각지 못한 계기가 찾아왔다.
“맥주 산업을 생각하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컴퍼니 한국지사를 다니던 그에게 2013년 인베브를 컨설팅하는 기회가 왔다. 인베브가 OB맥주를 다시 사들이는 딜에 대한 컨설팅이었다. 인베브(Anheuser-Busch InBev)는 벨기에의 세계적인 맥주 회사로 버드와이저, 코로나, 호가든, 스텔라 등의 맥주 브랜드를 갖고 있다. 맥덕인 그에게 이런 기회가 없었다. 딜을 통해 맥주 산업을 이해하게 된 그는 한국의 맥주 시장에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 취미 생활처럼 하던 맥주를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수입맥주를 접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반면 한국의 기존 맥주업체들은 기존 맛과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길을 찾는 자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2015년 그는 네덜란드에 교환근무를 나가게 된다. 맥덕인 그에겐 또 한번 좋은 기회였다. 일을 마치고 밤이 되면 그의 맥주 탐방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는 당시 한국에는 거의 없었던 맥주 자격증 시서론(Cicerone)을 네덜란드에서 취득했다. (시서론은 맥주 소믈리에라 불리는 일종의 감별 자격증이다.)
한국에 들어온 그는 창업을 준비했다. 맥주 감별은 자신 있었지만 맥주를 정말 잘 만드는 사람이 필요했다. 때마침 시서론 자격증을 따고 들어와 한국에서 맥주 심사위원을 하다가 알게 된 스티븐이 생각났다. 국내 수제맥주 경연대회인 홈브루잉 대회에서 12번이나 우승했던 브루마스터 스티븐 박이 KAIST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 대표는 다짜고짜 그를 찾아갔다. “경영이론 공부하지 말고 우리가 좋아하는 맥주나 직접 만들어봅시다”
그의 이런 제안에 스티븐은 뜻밖에 흔쾌히 수락했다. MBA도 해 봤고, 컨설팅 업무도 해 본 선배의 말이라 좀 더 와닿았을까. 어쨌든 스티븐 박에 이어 독일 베를린 VLB 양조 학교를 나온 김관열 팀장 등 업계 유명인들이 속속 합류했다. 초기 멤버 10명 대부분이 내로라하는 맥주 전문가들로 채워진 회사가 설립됐다. 업계에선 이때부터 벌써 ‘회사가 맥덕들의 집합소같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회사 이름을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라고 지었다.
“환경이 바뀌고 새 시장이 열린다”
몇 년 전 김 대표 주변엔 수제맥주집, 펍하우스 등을 오픈한 선후배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이들을 도울 겸, 노후 대비를 할 겸, 이런 곳 몇 군데에 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부분 이들 펍하우스들이 잘 안됐다. 왜 안됐을까.
그는 “성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제도적인 제약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양조사업이란 본래 규제가 많은 분야다. 국내에서 하우스맥주가 허용된 것이 불과 15년 전인 2002년이다. 이전에 하우스맥주는 불법이었다. 허용은 됐지만 외부 반출은 허가되지 않았다. 하우스맥주를 만들어 밖에다 팔 수는 없고 매장 안에서만 팔 수 있게 한 것이다. 맥주에 대한 이런 규제는 산업 성장을 제한했고 소비자들은 계속해서 맛없는 맥주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규제가 풀린 것이 2014년이었다. 당시 홍종학 의원 등이 주도해 맥주 외부 반출을 풀었다. 김 대표는 “이때 이후 수제 맥주 시장이 활짝 열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장이 열렸다고 해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큰 시장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어야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김 대표는 2010년 이후 약 5-6년에 걸쳐 한국의 맥주 시장이 대격변기를 맞이했다고 진단했다.
“동양맥주가 OB맥주가 됐고 조선맥주가 크라운맥주(하이트)가 됐죠. 2010년 이전까지는 두 맥주가 한국 맥주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롯데에서 클라우드 맥주가 등장하면서 시장에 충격을 줬고 양강체제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수입맥주가 급증하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맥주 맛을 알게 됐고 수제 맥주 시장도 덩달아 커지기 시작한 거죠.”
그는 한국에 새로운 맥주 시장이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겠다고 봤다.
“로컬에서 성장해 세계로 뻗어나간다”
술이란 본래 그 지역의 음식과 잘 맞는 맛을 찾아 발전하기 마련이고 술의 숙성과 발전, 맛이란 해당 지역의 토양에서 자란 원료를 기반으로 최적화된다는 게 그의 지론. 그런데 한국에서 맥주는 그런 과정이 거의 없었다고 그는 판단했다.
“술은 원래 지역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그 지역에 정착해야 입소문을 타고 각지로 뻗어나갈 수가 있는거죠.”
그가 서울 성수동에 처음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를 오픈하면서 지역 밀착 서비스를 내걸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공장 중심의 기존 수제맥주는 브랜딩이 전혀 안되고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브랜딩을 위해선 지역밀착형 서비스가 필요했고 그는 성수동을 택했다. 도심으로 들어와 도시민들이 사랑하는 맥주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사실 김 대표는 처음부터 ‘한국식 수제맥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그저 동네의 작은 수제맥주집에 머무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는 의미다. 한가닥하는 맥주 제조·유통·감별 전문가들이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에 모인 것이나 IT업종에 주로 투자하는 VC들이 이 회사에 투자한 것 모두 그의 이런 ‘남다른 꿈’때문이다.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는 거창한 꿈을 갖고 있지만 수제맥주는 ‘반드시 탄탄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1호점을 성수동의 명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첫번째 목표였다. 지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성수동 맥주집이란 목표를 달성해야 세계 시장 진출도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그의 표현에 의하면 ‘마법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성수동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매장은 매장이 눈 앞에 등장하기까지는 이런 곳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안드는 그런 분위기인데, 그런 매장에 동네 주민들이 줄을 서서 들어오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비결 중 하나는 도전정신과 남다른 ‘맛’이다. 이 회사의 대표작인 ‘첫사랑’은 맥주 맛의 핵심인 홉의 풍미를 극대화시킨 맥주다.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강한 홉의 향과 함께 마치 처음은 달콤하지만 끝은 씁쓸한 첫사랑과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성수동에 이어 그는 인천 송도, 서울 잠실 등에 2호, 3호점을 잇따라 개점한다. 캔맥주로 만들어 전국의 수제맥주 매장에 유통하기 시작했다. 배달도 한다. 3월 중순 서울 강남부터 ‘어메이징 익스프레스’라는 캔맥주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의 꿈 최종 단계는 글로벌 시장 진출. 김 대표는 “한국에서도 정말 세계인에게 통하는 맛있는 맥주가 가능하다고 믿고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며 “스타트업답게 도전하고 빠르게 성장해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한국의 맥주 회사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