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착각을 한 것일까. 그의 눈이 살짝 젖는 것 같았다. 창업하고 처음으로 상당한 규모의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던 이야기를 할 때였다. “전체 직원의 절반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 닥치니까 회사로 나가 직원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막막했습니다. 기업가로서의 삶이 끝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라는 말을 하던 이진수 포도트리 대표의 눈에 살짝 물이 맺히는 듯 했다. 창업한 뒤 2년 만에 자금이 모두 바닥나 직원들 50여명에게 월급을 줘야하는 날 통장에 800만원밖에 없었던 시절 얘기를 할 때도 담담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그였다.
2010년 7월 설립돼 이번 달로 창업한 지 딱 만 6년이 된 회사 포도트리. 화려하게 출발했으나 두 번에 걸쳐 망할 뻔한 위기를 겪었고 수익모델을 찾으려 몸부림쳤다. 이제는 하루 거래액 2억5000만원~3억원에 달하고 연간 거래규모 1000억원을 예상하고 있는 콘텐츠 플랫폼 회사가 됐다. 6년에 걸친 이 회사의 시작과 고난, 그리고 결실의 이야기를 이진수 대표에게서 들었다.
화려한 출발=김범수와 이진수의 공동 창업
2010년 7월, 이진수 대표는 포도트리를 창업했다. 모바일 콘텐츠 전문 앱 개발사였다. 글로벌 히트앱을 만들어 콘텐츠 앱 개발로는 글로벌 넘버1 회사가 되겠다는 게 이 회사의 비전이었다.
창업하기 직전 2010년 3월말경 이 대표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을 찾아갔었다. 서울대 경영학과(92학번)를 졸업하고 프리챌과 IBM, NHN 등을 거친 이 대표는 NHN 시절부터 김 의장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2009년말 아이폰을 사서 써 보고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한 교육용 콘텐츠 앱을 만들면 히트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는 김 의장을 찾아가 앱 개발사 포도트리 설립은 논의했다. 2010년 3월은 카카오톡이 출시된 시점이었고 김 의장은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을 활용할 비즈니스를 고심하던 때였다.
김범수 의장을 최대주주로 하는 포도트리 설립안이 이때 마련됐다. 그해 7월 회사가 설립될 때 최대주주는 김범수, 이진수 대표는 2대 주주이자 최고경영자를 맡았다. 이 대표와 NHN 시절 동고동락했던 이진영 이사, 차상훈 이사를 비롯해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의 인물들이 창업멤버로 합류했다.
2010년 12월초, 창업한 지 불과 3개월이 갓 지난 이 회사를 찾아갔을 때 회사 인원은 이미 22명에 달했고 앱 개발이 상당히 진행돼 있었다. 당시 이 대표는 “포도트리는 ‘간지 앤 크레이지’ 모드입니다”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명품 앱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팔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었다. 정말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들어 매우 저렴한 가격에 팔면 시장을 석권하지 않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일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학습 앱, 전자책 앱 등 다양한 교육용 앱을 만들어 나갔다. 2011년초부터 바로 앱이 출시됐는데 한국과 일본의 교육앱 시장에서 1등을 하는 등 시작부터 기세 좋게 출발했다. 앱의 품질에 공을 들인 티가 역력한데다 이런 앱을 불과 0.99 달러에 출시하니 사람들이 몰려드는 듯 했다. 그가 말 한 대로 글로벌 넘버원 콘텐츠 앱 개발사가 되는 꿈이 멀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앱 개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창업하고 1년반 만에 폐업 위기
포도트리가 개발한 교육 분야의 앱은 저마다 출시한 직후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회사 수익에는 별 도움이 안됐다. ‘고품질의 앱을 내놓으면 사람들이 앞다퉈 살 것’이라는 전제가 깨진 것이다. 돈이 안되자 이것을 계속해서 만들기도 애매해졌다. 포도트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당시 폭증하는 스마트폰 이용자를 겨냥하고 세계 곳곳에서 출시된 콘텐츠 분야의 각종 앱이 비슷한 처지에 몰렸다.
결국 창업한 뒤 1년쯤 지난 2011년 7월경부터 포도트리는 삼성전자와 전략적 제휴를 모색했다. 아이폰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에 비해 스마트폰 전략 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삼성이 소프트웨어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모바일 분야의 기업들과 제휴를 강화하던 시점이었다.
“앱을 그냥 앱스토어에 팔아서는 지속가능한 비즈니스가 안되겠더군요. 그래서 삼성전자와 제휴해 스마트폰에 기본 앱이나 서비스로 장착되는 방식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삼성벤처투자와 투자 유치도 추진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작업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투자가 될 듯 말 듯 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2011년이 저물고 있었다. 투자가 과연 될지 말지 불확실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직원들이 동요하기 때문이다.
2011년 12월23일 금요일 아침이 밝았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을 만큼 괴로웠다. “아침에 보니 통장에 돈이 800만원밖에 없더라구요. 50명 직원들한테 월급을 줘야하는 날인데 말이죠. 이날 삼성벤처투자의 투자금이 안들어왔으면 꼼짝없이 파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투자금이 이날 오후에 들어왔다. 파산은 면했지만 그는 그날로 정체불명의 병에 걸렸다. “땀이 나질 않는 거에요. 아무리 더워도. 병원에 갔더니 무슨 엄청난 울화가 치미는 일이 있는데 화를 내지 못하고 계속 참았냐고 하더라구요. 열을 제때 발산하지 못하니 피부병이 생긴거죠.”
투자금이 들어와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안도할 때가 아니었다. “왜 삼성이 이렇게 투자를 계속 주저했을까를 생각했어요. 투자를 받았으니 다행이 아니라 삼성으로 하여금 투자를 주저하게 한 그 요인을 해결하지 못하면 회사에 미래가 없다고 본 겁니다.”
삼성이 투자를 한 지 불과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전면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 대표는 이듬해인 1월4일 전 직원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워크샵을 했다.
완벽한 실패
투자금이 막 유입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으니 회사 분위기가 좋은 시기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심각했다.
“그 당시 6개 분야에서 총 14개의 앱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너무 뭐가 많았어요.”
‘범위의 함정→no killer 앱→다변화 심화→slow learning curve→느린 스피드→저성과’
이 대표가 직원들에게 보여준 포도트리의 2012년1월 현재 상황이었다. 결국 고비용 저효율 구조에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결론. 이대로 가다간 2011년12월의 상황이 2012년말에도 반복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앱스토어 랭킹과 판매액에 관계없이 그냥 가만히 지위를 유지만 해도 시장 규모와 100% 비례해서 함께 성장하는 방법이 뭘까요?”
그가 답까지 제시했으면 좋으련만, 그 역시 답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 우리들이 함께 답을 찾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직원들이 아마 허탈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삼성벤처투자에서 투자받은 금액이 30억원이었는데, 당시의 개발 규모와 인력을 고려하면 1년쯤 버틸 수 있겠더라구요. 6개월 안에 혁신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길 했습니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답을 찾으려고 했죠.”
그가 찾은 것은 개별 앱 개발사가 되는 게 아니라 콘텐츠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는 거였다. 일일이 개별 앱을 만들어서 시장에 파는 게 아니라 플랫폼을 만들고 단일 저작툴을 공개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올릴 수 있게 하는 거였다.
최대주주인 김범수 의장과도 상의를 했다. 결과는 OK. 그해 6월에 사업모델이 확정됐다. 전자책 뿐 아니라 VOD, 만화, 동영상, 각종 교육 콘텐츠 등을 만들어 올리고 이용하는 플랫폼이었다. 이듬해까지 쉴 새 없이 플랫폼 개발에 매달렸다. 그리고 2013년 4월에 카카오페이지라는 이름의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이 출시됐다. 카카오톡의 방대한 사용자를 기반으로 하면서 수많은 작가, 출판사, 파워블로거, 교육업체, 잡지사 등이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 및 유통 플랫폼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완전 망했어요.” 이 대표의 말이다.
그가 보여준 당시 방문자 수 및 수익 그래프에는 아무것도 표시돼있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용자 증가, 매출 증가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사용자는 매우 느리게 유입되고 이탈은 매우 빨랐어요. 재구매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죠.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혹독한 구조조정
카카오페이지를 오픈하기 전 2012년11월 포도트리는 삼성벤처투자, 메가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70억원의 추가 투자를 유치했다. 투자 누적 금액이 100억원을 훌쩍 넘어 있었다. 서비스 출시 직후엔 중국의 텐센트로부터 70억원의 투자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서비스가 처참하게 실패한 것이다.
그해 7월에는 심지어 가입자보다 이탈자가 더 많아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는 최고경영자로서 결심을 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그래도 판단이 빨랐습니다. 그게 제 장점이라고나 할까요? 하하”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당시 그로선 사선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다급했다. 어떻게 바꿔야 할까. 뭐가 문제일까. 시장에선 이미 카카오페이지가 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저작권자도, 소비자도 모두 불만이었다.
이 대표와 포도트리가 분석한 카카오페이지의 실패 원인은 너무나 많았다. 콘텐츠를 찾기도 힘들고, 가격도 복잡하고 유료 모델은 불편했으며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장르별 특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저작툴과 뷰어, 운영 방식 등으로 인해 저작자들도 불만이 폭주하고 있었다. 총체적인 실패인 셈이다.
“그때 저희는 세 가지 ‘되겠지’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하는 세 가지 ‘되겠지’ 신드롬이란 ‘카카오니까 되겠지’, ‘새로우면 되겠지’, 그리고 ‘추천하면 무료인데 되겠지’ 였다.
재빨리 개편에 나섰다. 2013년 9월에 ‘카카오페이지 2.0’ 버전이 오픈됐다. 핵심은 콘텐츠 분절 판매였다. “책과 만화를 전부 분절해서 올려놨습니다. 조금씩 볼 수 있게 한 거죠.”
처음엔 출판사들과 저작권자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움을 받기가 힘들어 동의만 얻고 책을 분절하는 작업을 직접 했다고 한다. 여기에 애니팡의 하트 소진과 충전 모델을 도입했다. 일단 효과는 있었다. 방문자 수가 늘었다. 결제를 하는 사람들도 확실히 늘어났다. 일 사용자 수가 기존 1000명 대 수준에서 이제는 2만명~3만명 수준으로 늘었다.
“여전히 형편 없는 수준이었어요. 나아지긴 했죠. 하지만 그 수준에서는 회사가 지속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이 밝았다. 상황은 비슷했다. 쓰는 돈에 비해 나가는 돈이 훨씬 많으니 실적 개선은 요원했다. 어느새 100명을 넘어선 인원에 대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 흔히들 눈에서 피눈물이 난다고 하는데, 그런 심정이었을까. “40~50명을 구조조정해야 했습니다. 정말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어요.”
그는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모든 SNS를 다 끊었다. 회사가 이 지경인데 사람들과 온라인에서 희희덕거릴 마음이 나질 않았다. 회사가 잘 되지 않으면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급한대로 구조조정을 했지만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DAU 2만~3만명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무엇보다 잔존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계속 반복적으로 서비스 이용을 위해 방문하는 이들이 감소하고 있다는 거였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기다리면 무료…포도트리를 살린 BM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콘텐츠로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좋은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면서도 기꺼이 이들이 돈을 내게 함으로써 수익을 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대표가 마치 독백처럼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1인극처럼 자신에게 대답했다.
“저는 다른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기다리면 무료’를 하지 않았으면 아마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죠. 저희가 볼 때 이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구조조정을 거친 뒤 2014년 4월 카카오페이지는 세 번째 버전을 공개했다. 버전이 나올 때마다 운영방식과 비즈니스 모델이 달라졌다. 이번엔 웹소설과 웹툰을 도입했다. 웹소설과 웹툰이 들어오고 나서 매출과 트래픽이 동시에 늘어나는 우상향 성장이 시작됐다. 2014년 4월 이전 꼼짝도 않던 성장 그래프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일 사용자 수는 3만명에서 20만명으로, 월 매출은 6억원 안팎에서 13억원으로 늘었다.
그리고 그해 2014년11월 ‘기다리면 무료’ BM이 도입됐다. 말 그대로 기다리면 무료로 콘텐츠를 볼 수 있는 방식을 도입한 것. 사용권을 충전해야 잘게 쪼갠 콘텐츠를 계속해서 이어 볼 수 있는데 여기에 과감하게 일정 시간이 지나가면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무료로 볼 수 있는지 시간표시로 알려줬다. 예를 들어 24시간이 지나면 무료로 볼 수 있음을 소비자에게 알려주면서 시계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23시간, 22시간…남아 있는 시간을 표시해주면서.
“안에서 치열하게 논의를 했어요. 만일 전국민이 그냥 기다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진거죠. 물론 전국민이 다 기다리면 우리는 망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기다리면 무료라는 걸 알지만 결국 결제를 했고, 여러 가지 콘텐츠를 보기 위해 습관적으로 들어왔다가, 잠시 기다려도 봤다가, 결국 결제를 하고 여러 콘텐츠를 봤다. 기다리면 무료 방식은 습관적인 재방문과 재구매를 유도했다.
2014년 11월까지 매달 적자를 면치 못했고,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이어갔던 포도트리는 기다리면 무료 BM을 출시한 뒤 벌떡 일어났다. 2014년 12월 월 단위로 바로 흑자전환을 했고,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다. 하루 이용자 수는 20만명에서 90만명으로, 월 거래 금액은 13~14억원에서 75억원으로 급증했다. 하루 거래 금액만 2억5000만원을 웃돌고 있다.
우리의 가장 큰 경쟁자는 ‘어제의 우리’
2015년 포도트리의 카카오페이지 연간 콘텐츠 거래액은 600억원을 돌파했다. 올해는 1000억원을 가뿐히 넘어설 것이라고 보고 있다.
“2010년 창업했을 때 제가 회사 슬로건 말했던 거 기억하세요?” 물론 기억하고 있다. “Apps that breathe”
“맞아요. 제가 정했던 겁니다. 살아 숨쉬는 앱을 만들자는 의미였어요. 그만큼 생생하고 최고의 앱을 만들어서 세계 시장에서 승부를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뭘까요.” 내가 알 턱이 없다.
“지금은 One Step More입니다. 이건 직원들이 지었어요. 한 걸음만 더.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만 더 가자.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한 걸음만 더 가자. 주저앉지 말고 한 걸음만 더 가자.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우리가 깨달은 겁니다.”
포도트리는 2015년말 큰 변화를 겪었다. 최대주주인 김범수 의장의 지분을 전량 카카오가 인수하고 이진수 대표의 지분도 절반 가량을 카카오에 넘겼다. 이제 김범수와 이진수의 회사가 아니라 카카오의 자회사가 된 것이다. 이제 포도트리 전체 지분 중 70%를 카카오가 갖고 있다. 이진수 대표는 여전히 포도트리의 대표이지만 카카오라는 더 큰 틀에서 움직여야 한다.
포도트리는 올해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1000억원 거래를 예상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1조원짜리 회사. 그가 입버릇처럼 외는 말이다. “사업을 시작했으면 1조원짜리 회사는 만들어야죠!”
그는 더 이상 2010년 12월에 만났던, 당시 창업한 지 4개월짜리 회사를 이끌던 그 때의 이진수 대표가 아니었다. 여전히 섬세하고, 치밀하고, 주도면밀하지만,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시장을 배웠고 직원들과 함께 성장하는 것을 배웠다. 그와 장장 네 시간이 넘는 대화를 나눴지만 그의 마지막 말이 나에겐 가장 와닿았다.
“우린 요즘 회사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경쟁자는 다른 경쟁사가 아니라 바로 어제의 우리, 지난 주의 우리, 그리고 한달 전의 우리라고 말입니다. 어제의 우리에겐 수도없이 깨졌고 지금도 깨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의 우리에게도 많이 졌습니다. 하지만 한 달 전의 우리에겐 결코 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35개월이 지났습니다. 35개월동안 우린 한 달 전의 우리의 모습보다 더 나은 실적, 더 나은 실력을 보여주면서 계속 성장해왔습니다.”